마음길 따라 25

물결나비

[물결나비] 물이 흘러갑니다. 배밀이 하듯 흘러갑니다. 물에 기대어 물 위에 물이 흘러갑니다. 물이 물을 누르며 흘러갑니다. 바닥이 물결을 만들고 바람의 결을 받아드려 춤추며 흘러갑니다. 안개가 스멀스멀 펴올라 아른아른 꿈결 같은 비단길을 만듭니다. 결마루를 건너뛰며 물수제비가 통통 걸어갑니다. 동심원이 물결을 타고 넘어 물결을 밀고 나갑니다. 물결무늬. 물결이 빛을 받아 황금빛 물비늘이 돋아나납니다. 눈부시게, 눈부시게 반짝입니다. 한결 찬란하게 빛나는 고운 아침이 떠내려갑니다. 조잘조잘 흘러가는 물소리 따라 흘러가는 빛의 파편들, 결 고운 빛의 파동이 번져갑니다. 가슴에 넘치는 잔잔한 기쁨이 물결처럼 밀려옵니다. 반짝이는 수천마리 물결나비 물결나비 떼가 온 우주로 날아오릅니다.

마음길 따라 2022.09.25

꽃의 시간

[꽃의 시간] 하루치의 어둠이 한 점으로 모여들어 밤으로 지나가고 한 생명의 모든 것이 한 점으로 응축되어 한 생애를 건너뛴다. 수직으로 쏟아지던 빛, 비스듬히 스러져 긴 그림자를 만들고 희미해지는 삶의 면적은 점점 엷어져서 내 것이라고 할 만한 땅, 한 점으로 졸아들고 있다. 내년에도 또 다른 꽃이 피어 그 꽃 볼 수 있을까. 지나고 보면 삶은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꽃이 피었다가 꽃 지듯 살아지는 것 이었다. 꽃핀 시간보다 훨씬 더긴, 잠든 꽃 속에 갇힌 시간. 한없이 깊은 적막 속에서, 멈춰선 시간이 고개를 들고 다시 꽃 한 송이의 시간으로 피어 날 때까지 끝내 한 점, 시간 속으로 들어가 잠자는 것이었다. 꽃 시절은 잠간, 꽃처럼 살던 시간이 점점 시들어가고 있다.

마음길 따라 2022.08.21

입동

입동 낙엽은 어디론가 길 떠났다. 이제 울음을 그쳐야할 시간이다. 멀리서 가까이서 거리를 가늠하며 긴 그림자로 닥아와서 떠나 갈것은 모두 어두운 그림자 속으로 묻어야 할 시간이다. 숨어울던 풀벌레 소리도 적막의 시간을 수확하고 입 다물었다. 바람도 숲으로 내려와 텅 빈 하늘 나뭇가지에 매달린 눈썹 달 별빛에도 가만히 눈 맞추는 시간이다.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마음. 가슴 가득 안겨오는 슬픔도 모두 비워야 할 가만가만 내려 앉는 조락의 시간이다. 미쳐 물들지 못해 푸른마음으로 시들어 간다해도 아등바등 매달리던 손길도 놓아버리고 상실의 아픔도 가만히 내려놓고 스스로 익어 저절로 떨어질 시간이다. 사라져가는 뒤끝의 허허로움, 더 이상 무상함에 흔들리지 말고 이별의 시름을 꼭꼭 땅속에 묻고 고요히 침잠할 시간이..

마음길 따라 2021.12.02

변산바람꽃

[변산 바람꽃] 내가 나를 보듯, 떨리는 마음으로 오늘 지금 여기 이 자리에 내 속에 갇혀있던 작은 불씨 한 개. 바람꽃으로 피었다. 한없이 여리고 가녀려 푸른빛 도는 하얀 얼굴. 차가운 땅 속에 생명 한 줄기 그 아득하고 먼 길 찾아와서 굳게 닫힌 마음의 틈새에 변산 바람꽃, 까칠한 얼굴로 배시시 웃으며 피었다. 찬바람 부는 날 너에게로 가는 길 애타게 불러서 찾아 온 듯 지금, 여기, 이 순간, 발밑에 쪼그려 앉아 내 스스로 나에게 무릎을 꿇고 너와 만나는 접점의 순간 뚝, 시치미 떼고 생각 없이 바람꽃 네가 나를 환하게 꽃피웠다. 온 몸으로 젖어드는 꿈같은 내안의 선연한 그리움. 설레는 마음, 작은 떨림으로 변산 바람꽃이 활짝 피었다.

마음길 따라 2021.02.20

마음이 밖으로 나가 길을 만드네

[마음이 밖으로 나가 길을 만드네] 뒤 돌아보면 걸어온 길 한없이 멉니다. 꼬물꼬물 살아오는 길 끝. 다가가면 길은 더 멀리 가 있습니다. 수많은 길 걸었어도 뒤돌아보면 항상 외줄기입니다. 끝없이 걸어가야 할 멀고 먼 길. 걸으면 걸을 수 록 더 멀어지는 길 길은 길고도 긴 외로움입니다. 혼자 걸어야할 적막이 끝없이 이어져도 가끔은 절망으로 길을 잃어도 길 끝에 희망이 등불처럼 매달려있습니다. 길 따라 길 떠나지 않고는 못 배기는 길 그 끝이 죽음일지라도, 언제나 시선은 길 끝에 맺힙니다. 걸어야 할 길이 있어 길을 걸을 뿐, 내가 만든 길인 줄 모르면서 길을 갑니다. 세상의 모든 길은 나를 찾아가는 길 그 가운데 다른 길은 없습니다. 한 점 마음에서 시작하고 한 점 마음으로 되돌아옵니다. 길 아닌 길로..

마음길 따라 2020.12.18

달빛

[달빛] 풀 섶에 숨어 우는 풀벌레 소리 애절함이 마음에 와 닿아 나무 밑에 웅크리고 앉아 귀 기울인 시간 저녁이 어둠을 주섬주섬 모아 들였다. 사위가 고요해지고 맑은 하늘이 어두워지자 푸른 별빛이 우르르 쏟아져 내려왔다. 사랑은 제 스스로 세상에 그득하다하나 만날 수가 없고 멀리 떨어져서 그려보는 달빛 같은 그리움. 둥실 두둥실 보름달이 떠올랐다. 무리지어 개망초꽃 환하게 핀 머리 위 그리움의 푸른 달빛, 서리처럼 하얗게 내려앉았다

마음길 따라 2020.11.25

다시 만나려면

[다시 만나려면] 수천 년 잠들다 생명으로 태어나 고작 백년의 시간을 보내야 하나 하루해가 지듯 또 한 계절이 지나가고. 하루해가 지듯 또 한 생애가 지나가야 하나 수많은 낙엽을 보며 가을이 지나 가도 그 낙엽 어디로 가는지 눈여겨보지 못하고 이 가을은 또 잊어야 하나 이제는 남은 가을의 숫자를 가늠해야 하나 강물이 바다로 흘러가듯 그대 엇갈린 생명의 물줄기, 가을강물처럼 슬프게 흘러야 하나 한 계절이 길을 열고 그 길 따라 길을 걸어도 끝내는 뒷모습 보이며 멀어져가야만 하는 안타까운 세월 쉼 없는 시간에 외로운 발길을 내 주어야만 하나 온 길 없어지고, 가는 길만 조금 남아서 그대 이름 부르면 가슴이 저며 와 걷고 또 걷다가 지쳐 스러져서 이 세상 끝나면 다시 윤회를 꿈꾸어야 하나. 죽을 수 없는 불멸..

마음길 따라 2020.11.25

어리연꽃

[어리연꽃] 푸른 호수를 바라보면 점점 호수를 닮아 가고 싶은데 출렁이는 내 가슴의 슬픈 호수에는 소화시키지 못해 앙금으로 가라앉은 일상의 퇴적물. 점점 가슴이 옅어 진다. 살려고 허우적거리며 입을 뻐끔 거리면 얕은 수면위로 트림 같은 기포가 뽀글뽀글 올라온다. 호수는 제 스스로 맑다고 하나 갇힌 물의 시간이 일상의 퇴적물로 깊이를 포기하고 가늠할 수 없는 수렁이 되어. 별빛도 달빛도 더 이상 내려오지 않는 늪으로 변해 갈 뿐이다. 한번 빠지면 헤어나기 힘든 곳 죽음의 진창 속으로 푹푹 썩어 흙으로 돌아가는 긴 세월 검은 물빛에도 햇빛이 내려와 뿌리내린 어리연꽃 노랗게 피어나고 꽃 그림자가 까맣게 얼비친다. 살아온 날 뒤돌아보면 컴컴하고 아득하여 세상의 바닥이 얼마나 깊은지 내 스스로 점점 더 어두워져서..

마음길 따라 2020.10.16